☞ [李朝實錄] - 肅宗 3卷, 1年(1675 乙卯 / 청 강희(康熙) 14年) 4月 16日(甲辰) 昔東國三分之日, 以高句麗蕞爾之國, 能走隋、唐百萬之師, 至勝國姜邯賛, 亦擊破丹兵, 此在將相之得人而已。 옛날 우리 나라가 삼국(三國)으로 나뉘었을 적에 고구려(高句麗)는 조그만한 나라였지만, 능히 수(隋)와 당(唐)의 백만(百萬)의 군사를 달아나게 하였고, 승국(勝國)에 이르러서도 강감찬(姜邯贊)이 또한 거란(契丹)의 군사를 쳐서 깨뜨렸으니, 이는 장상(將相)에 적임자를 등용했기 때문이다. → 승국(勝國) : 全州李氏王朝가 高麗國家에 勝戰했다는 기록 ☞ [李朝實錄] - 英祖 74卷, 27年(1751 辛未 / 청 건륭(乾隆) 16年) 9月 27日(庚寅) 命祭高麗杜門洞七十二忠臣, 開城留守徐宗伋狀聞也。 又以御筆, 書下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十四字, 命刊碑竪之。 高麗의 두문동 72인(人)의 충신(忠臣)에게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명하였으니, 개성 유수 서종급(徐宗伋)의 장문(狀聞)으로 인한 것이었다. 또 어필(御筆)로서 ‘고려 충신이 지금도 그 명성이 남아 있으니 특별히 그 동(洞)에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는 열 네 글자를 써서 내리고 비(碑)에 새겨서 세울 것을 명하였다. → 高麗王朝 인사들의 명예가 회복되던 시기 : 현종, 숙종, 영조, 정조 [淸史稿](朝鮮列傳)日使大鳥圭介首責朝鮮獨立 [淸史稿](朝鮮列傳)朝鮮為清屬國者凡二百五十有八年,至是遂為獨立自主國云。 ☞ [李朝實錄] - 高宗 33卷, 32年(1895 乙未 / 청 광서(光緖) 21年) 5月 10日(庚辰) 若夫例年의 獨立慶日을 定야 永久히 我國의 一大慶節을 삼아 朕이 臣民과 함 祝賀 規法은 朕이 다시 朕意를 臣民에게 諭告리라。” 연례(年例)로 할 독립 경축일(獨立慶祝日)을 정하여 영구히 우리나라의 하나의 경사스러운 큰 명절로 삼음으로써 짐이 신하와 백성과 함께 축하하는 규범에 대해서는 짐이 다시 짐의 뜻을 신하와 백성들에게 유시(諭示)하겠다.” → 三田渡항복에 대한 李氏朝鮮의 獨立 ☞ [李朝實錄] -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8월 16일 蓋周王作興, 禮始定於成、康之世, 漢帝創業, 元肇稱於文、景之年。 乃於今年八月十六日, 祗告天地、宗廟、社稷, 建元 光武 대체로 주 나라가 일어난 후 예절은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시대에 처음 정비되었고 한(漢) 나라가 나라를 세운 다음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연간에 연호를 처음으로 썼다. 올해 8월 16일 삼가 천지의 신과 종묘 사직에 고하고 ‘광무(光武)’라는 연호(年號)를 세웠다. ☞ [李朝實錄] - 高宗 36卷, 34年(丁酉 / 대한 광무(光武) 1年) 10月 11日(陽曆) “國家, 因箕子舊封朝鮮之名, 仍以爲號, 未始爲切當。 今於邦舊命新之日, 定有天下之號, 應合典則矣。”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옛날에 봉(封)해진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그대로 칭호로 삼았는데 애당초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나라는 오래되었으나 천명이 새로워졌으니 국호를 정하되 응당 전칙(典則)에 부합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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