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人民共和國 (People's Republic of KOREA) 朝鮮人民共和國 (P R of KOREA)

※ 조선건국동맹 - 조선독립동맹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조선의용군 (Korean Volunteers Army) 김두봉, 김원봉, 김무정, 최창익
※ 중국의용군 (Chinese Volunteers Army) 모택동, 팽덕회 (참고 - 시중슁)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약칭 "조선", "인공")은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선포했다

해방 직전, 소비에트 연방청진 상륙 작전을 개시하자 조선총독부경성까지 소비에트 연방이 점령하겠다는 우려에 좌파민중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여운형과 접촉하였다.[주 12][주 13] 1945년 8월 14일, 여운형은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이었던 니시히로에게서 일본의 패전소식과 함께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관저(서울 필동)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어서 총독부 정무총감은 여운형과 교섭하여 '자신들을 포함해 조선에 거류중인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빠져나오도록 해달라'고 하자, 여운형은 5개항 보장 조건을 전제로 수락하였다. 여운형이 제시한 5개항 조건 전제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로 1945년 8월 15일, 아침에 여운형이 이곳에서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정치범으로 수감중이던 독립운동가 조봉암의 출소 소식을 듣고, 직접 마중나가기도 했다.[78] 8월 15일, 밤 자신이 이미 1년 전인 1944년 8월에 결성한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79] 1945년 8월 16일, 시민들은 전날 8월 15일 라디오 방송이 일본제국 천황의 항복 방송인 줄 알게 되자 환호하였다.


# 제1차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으로 추대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이승만은 1945년 10월 18일에 귀국한 후 10월 22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된 것은 모르는 일이며 취임하겠다고 호의를 표한 적도 없다고 밝혔으며,[3][4] 11월 7일에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공식적으로 주석직을 거부하였다.[5][6] 뒤이어 귀국했던 김구와 김규식 또한 11월 28일에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과 이야기가 오고간 것이 없었다며 관계된 것을 부인하였다

# 여운형은 "임정이 해외에 30년간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업적이 없고, 국내에 인민적 토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로 군림할 수 없으며, 임정은 많은 해외독립단체가 만든 정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짧은 견해 - 몽양 여운형
  • 임시정부는 30년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 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에 기초가 없어 군림이 불가하다는 점
  • 연합국한테 승인되지도 될 수도 없다는 점
  • 미주(美洲), 연안,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혁명단체 중에는 임시정부보다 몇 배가 크고 실력 있고 맹활동한 혁명단체가 있으며 그네들 안중에는 임시정부가 없다는 점
  • 국내에서 투옥되었던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 안전지대에 있었고 객지고생만 한 해외 혁명가 정권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라는 점
  • 중경 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아무런 혁명 공적이 없는 자들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는 것이고 건준의 정권수립권(權)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
  • 중경 임정만을 환영하는 것은 해내해외의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라는 점

  • ※ 위키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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