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동맹(여운형 등) 조선건국동맹(여운형 등)

※ 조선건국동맹

1943년~1944년 무렵 여운형은 조직의 명칭으로 '조선해방연맹','조선민족해방연맹','인민전선','인민위원회' 등을 구상하다가 건국동맹이라는 명칭을 확정하였다. 조선민족해방연맹,조선해방연맹이라는 명칭은 민족해방이라는 과제에 중점을 두었다. 이 명칭은 1930년대 후반~40년대 초반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사용하던 조직명을 염두에 둔 것이며, 1942년 옌안에서 조직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일정한 통일성을 의식한 것이었다. 인민전선,인민위원회의 경우는 조직이 각계각층을 망라한 통일전선적 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강조점이 두어졌다. 인민전선의 구상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결성된 '반파쇼인민전선','반제민족통일전선' 강조의 흐름과 일정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인민위원회의 경우에는 정권형태 혹은 국가건설의 방향에 초점을 두었다. 인민전선이란 명칭은 반(反)파쇼,반제(反帝)세력을 투쟁전선으로 묶어낸다는 의미가 강했고, 인민위원회는 반면에 항일투쟁에 대한 강조를 담아낼 수 없었다.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명칭은 민족해방투쟁보다는 해방 후 '건국준비사업'에 보다 강조점을 둔 것이었다.

건국동맹은 1944년 10월에, 다음과 같은 3가지 강령을 채택하였다.
  • 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제세력을 구축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일
  • 반추축(反樞軸) 제국(諸國)과 협력하여 대일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일.
  • 건설부면(建說部面)에 있어서 일체 시위(施爲)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일.

해외 독립운동단체 세력과의 연락

건국동맹이 조직활동과 함께 중시한 것은 해외혁명단체와의 연락,연대관계 수립이었다. 이를 위해 건국동맹의 조직 후 북만주(최근우. 당시 최근우는 만주협화회에 활동해 있었다.),베이징(이영선,이상백,박승환,엄태섭),옌안(이영선,이상백,박승환) 등지에 연락원을 선임,파견하였다. 가장 주되니 대상은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과의 연락이었는데, 1942년에 결성된 옌안의 화북조선독립동맹은 국내의 운동세력과 연계노력을 계속했고 여러 차례 걸쳐 조선공산당 재건과 항일운동을 위해 여운형 측에 사람을 파견한 바 있었다. 여운형 역시 1940년대 초반부터 독립동맹세력과 연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독립동맹과의 연결계획에는 군대편제 계획, 유격대의 국경침투 계획,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武亭)과의 연락, 만주군대 지휘 계획의 수립, 만주 군인의 입국시를 대비한 은신처, 식사공급계획 등이 포함되었다. 건국동맹과 독립동맹의 연락관계는 1944년 말부터 본격화되어 광복 직전에는 본격적인 연대의 차원의 차원으로 발전할 전망을 보이고 있었다.

1944년 12월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의 연락원이 베이징에 도착해 이영선,이상백과 회견한 후, 1945년 4월에는 옌안에 건국동맹 대표를 파견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김순자(박승환의 부인),이영선을 통해 독립동맹 주최 '국치기념대회'에 국내정세보고서, 통계 등의 자료 전달(1945년 6월), 8월에는 옌안의 전조선민족대회에 건국동맹 대표 김명시,이영선 파견 등이 잇달았다. 또한 독립동맹과의 연계는 단순히 항일투쟁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광복 후 건국동맹과 독립동맹이 동일한 노선하에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연대한다는 국가건설 문제에까지 이어졌다.

건국동맹은 충칭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맺기 위해 1945년 4월 최근우를 베이징으로 파견했으나 접촉하지 못했다. 또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김일성 자신이 '항일무장투쟁 시기에 여운형과 접촉하기 위해 연락원을 파견했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 위키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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